'자신의 조그만 이익에만 급급해 하는 '나'는 감옥이란 극한적인 상황에서만 나타나는가.
우리 주변에도 자신을 위해 대의를 버리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김동인의 소설 「태형(笞刑)」은 무더운 여름 감방에 갇힌 '나'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3.1운동 직후
다섯 평도 채 안되는 숨 막히는 공간에서 40여 명의 죄수와 함께 하루하루 공판을 기다리고 있는 '나'.
나의 절실한 욕구는 더 이상 조국의 독립도, 민족의 자결이나 자유도 아니다. 냉수 한 그릇과 맑은 공기가
전부일 뿐, 나라 생각은 사치다. 그러던 어느날, 70세가 넘은 영원 영감이 태형 구십 대 형을 받고, 맞으면
죽을 것 같아 항고했다는 말을 듣는다.
'나'는 다른 재소자와 한 패가 되어 영감을 윽박지르기 시작하다. 아들 둘이 죽었는데 혼자 살아 무었하나, 태형
받고 나가서 맑은 공기나 마시지, 당신이 나가야 감방의 자리가 조금이라도 넓어질 건데...... 결국 노인은 공소를
취하고 태(笞)를 맞으러 나간다. 덕분에 오랫만에 넓어진 자리, 역시 일신의 편안이 최고로구나, 그러나 태로 인해
죽음에 이르는 노인을 보자 '나'는 괴로워진다. 타인의 고통과 나라에 대한 무관심, 이기심, 도덕과 양심을 포기한
'나' 가 너무 추해 보여서.
자신의 조그만 이익에만 급급해하는 '나'는 감옥이란 극한적 상황에서만 나타나는가. 우리 주변에도 자신을 위해
대의를 버리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특히 경제에서는 소비자나 기업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 하는 선택을 한다.
미시경제 주체인 '나'는 거시경제의 성과 보다는 '나'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미시적 차원의 선택이
궁극적으로 사회 전체의 이익과 조화되어야 하지만, 때로는 미시경제와 거시경제는 서로 상충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저축은 개별 가계의 부를 축적하는 수단이지만, 모든 국민이 '나'를 위해 저축만 한다면, 거시경제는 소비부족으로
침체될 수밖에 없다. 이를 '저축의 역설'이라 한다.
국민경제를 위해서는 임금이 안정되어야 하는데, '나'만 손해 볼 수는 없다.
기업이 살기 위해 노사 관계가 원만하게 유지되어야 하지만, 왜 '나'만 양보해야 하는가.
국민을 위한 화장장은 필요한데, 왜 하필이면 우리 집 뒷산이란 말인가.
대기업의 경제집중은 완화되어야 한다면서도, '나'는 믿음직한 대기업 제품만을 고른다.
'나'의 이기적인 선택이 과연 바람직한가.
개별 경제주체의 미시적 동기가 거시경제의 바람직한 방향과 역행하면 좋은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개별 주체가 스스로 행동하게 하는 미시적 동기가 부여되지 않는 정책은 성공할 수 없다.
정부가 아무리 뭐라 해도 일상의 '감방에 갇힌 나'는 당장 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먼저 고려하는 그 속마음까지 정부가 통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혹자는 도덕과 윤리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감방'에서 이루어지는 미시적경제활동이 거시적 결과와
조화를 이루게 할 수 없다.
그래도 비교적 효율적인 정책수단이 있다면 미시적인 주체인 '나'에게 시장의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다.
이기심을 탓하지 말고 바른 방향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물질적인 보상을 부여하는 것이다.
서비스에 적절한 가격과 자율화의 인센티브가 주어져야만 더 좋은 서비스가 등장한다. 이것이 바로
시장의 원리이고, 미시적 선택과 거시경제의 성과를 연결해 주는 메커니즘이다.
'경제관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산층 기준 (0) | 2011.06.11 |
---|---|
경제 지표들 (0) | 2011.06.11 |
죄수의 딜레마 (0) | 2011.06.11 |
대한민국 경제 성장기록(1) (0) | 2011.06.11 |
기업이익을 측정하는 지표 (0) | 2011.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