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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역사

수리쉬리 2011. 6. 11. 14:46
2010/02/26 08:52

고대 서양의 세계

 

ㅡ 에게 문명 ㅡ

 

유럽에서 맨 먼저 문명이 싹튼 곳은 오리엔트와 그리스 사이에 있는 에게 해의 섬들과 그 주변 지역이었다. 이 곳에서는 기원전 3000 ~ 기원전 2500년경에 오리엔트 문명의 영향을 받은 청동기 문명이 일어났는데, 이를 에게 문명이라 한다.

 

그러나 에게 문명도 두 계통이 있어, 전기의 크레타 문명과 후기의 미케네 문명으로 구분 된다.

 

크레타 문명의 중심지는 에게 해의 남쪽 끝에 있는 크레타 섬이었다.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에는 웅장한 궁전 유적이 남아 있고, 세련된 벽화와 도자기 등도 발견되었다. 이들 미술품은 오리엔트 것보다 밝고 사실적이며 섬세하다.

이로 미루어 보아 크레타 문명을 이룩한 사람들은 오리엔트와는 달리 자유롭고 활동적인 생활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계통의 민족이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곧 그들이 사용한 문자가 아직 해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은 해상 무역에 종사한 상업 민족으로서, 강력한 해양 왕국을 건설하고 에게 해 일대에 영향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크레타 문명은 기원전 1500년경을 고비로 쇠퇴하고,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 ·  티린스 등을 중심으로 한 미케네 문명이 번창하였다.

이 문명의 주인공은 그리스 인의 한 갈래인 아케아 인으로, 이들은 크레타 문명을 이어 받으면서도 군사적 성격이 강한 독특한 문명을 이룩하였다.

미케네 문명도 청동기 문명으로 에게 해 주변에 퍼져 나갔으나, 기원전 1200년 경 그리스 인의 또 다른 일파인 도리아 인에게 정복 · 붕괴되었다.

 

ㅡ 도시 국가의 성립 ㅡ

 

그리스 인은 인도ㅡ 유럽 어족에 속하며, 아케아 인 · 아오니아 인 · 도리아 인 등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그 중 아케아 인이 그리스 땅에 먼저 이동해 와서 미케네 문명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미케네 문명은 기원전 1200년경에 마지막으로 이동해 온 도리아 인에게 붕괴됨으로써 한동안 혼란 상태가 게속되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8~ 기원전 7세기 경에 폴리스라고 불리는 도시 국가가 그리스 곳곳에서 건설되었다.

폴리스는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아크로폴리스라는 언덕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그리고 아크로폴리스 밑에는 아고라라고 불리는 넓은 광장이 있다. 폴리느는 도시 국가라지만 도시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둘레에 있는 농촌까지 포함되었다.

 

이와 같은 폴리스는 100여 개나 되었는데, 큰 것은 인구가 20~30만 명, 작은 것은 수천 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모두가 완전한 독립 국가였다.

그리스는 원래 산지가 많고 평야가 적나, 산이 곳곳에 가로막혀 있어서 교통이 불편한데다 그리스 인은 자주 정신이 강하였기 때문에 여러 폴리스로 갈라져 살았다. 각 폴리스에는 처음 왕이 있었으나, 왕권이 약하여 왕정은 폐지되고 귀족이 정권을 잡은 귀족 정치로 바뀌었다.

 

ㅡ 그리스 세계의 확대 ㅡ

 

그리스 본토에 많은 도시 국가가 성립된 기원전 7세기 경부터 그리스 인의 해외 진출이 활발해졌다. 본래 진취성이 강했던 그리스인은 소아시아를 비롯한 에게 해 연안 일대에 진출하여 새로운 도시 국가를 이룩하였다.

각 폴리스는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자, 시민들은 흑해와 지중해 연안까지 보내어 식민 도시를 건설하였다. 이리하여 에게 해 ·흑해 · 지중해 일대가 그리스 인의 세계로 변하였다.

그리스 인은 이와 같은 식민 활동에 아울러 무역 활동을 활발하게 벌였다. 이에 따라 화폐 경제가 발달하고 수공업도 일어났다. 이오니아(소아시아 서해안 지방)의 여러 도시 국가와 그리스 본토의 아테네는 상업과 무역을 통하여 차츰 부강해졌다.

 

ㅡ 아테네의 민주 정치 ㅡ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 중에서도 가장 눈부신 활동을 벌인 나라는 아테네였다. 아테네는 이오니아 인이 세운 도시 국가로, 일찍부터 해외에 진출하였다.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지방은 ‘이오니아 인이 사는 땅’이란 데서 유래한 것이다.

아테네는 해외 진출과 무역의 발달로 상인층의 세력이 커졌다. 이에 그들은 귀족들에게 참정권을 요구하게 되었다.

기원전 6세기 초에 귀족과 평민의 대립이 격화되자, 솔론이 중간에 나서서 양쪽을 조정하는 법을 만들었다. 솔론은 시민(귀족·평민)을 재산 정도에 따라 4등급으로 나누고 각 등급의 권리 · 의무를 정했는데, 이에 따라 일부 부유한 평민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재산 정치(금권 정치)라고 한다.

그러나 솔론의 개혁 후에도 참정권을 얻지 못한 평민들의 불만 때문에 싸움이 계속되었다. 이 틈을 타서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나타나 정권을 잡고 독재 정치를 실시하였다.

이를 참주 정치라 하는데,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하였다.

기원전 6세기 말에 클레이스테네스는 대부분의 시민이 동등한 자격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일대 개혁을 단행하여 아테네의 민주 정치를 확립시켰다. 그는 또 참주(독재자)의 출현을 막기 위한 도편 추방제(오스트라시즘)를 만들어 민주 정치를 더욱 굳건히 하였다.

 

ㅡ 스파르타의 군국주의 ㅡ

 

아테네와 함께 가장 대표적인 폴리스는 스파르타였다. 그런데 이 두 나라는 아주 대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스 남부의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자리 잡은 스파르타는 도리아 인이 세운 정복 국가였다. 그들은 정복한 원주민을 노예(농노)로 삼아 농사를 짓게 하고 공납을 받아 생활하였다.

지배자인 스파르타 인은 그들보다 20배나 많은 노에와 이웃 민족들을 다스려야 했으므로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스파르타의 모든 시민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곁을 떠나 엄격한 군사 훈련을 받았으며, 용감한 병사가 되어 오로지 병역에만 종사하였다.

스파르타는 이와 같은 군국주의 체제를 취하였기 때문에 군사력은 막강하였지만, 문화나 경제면에서는 아테네보다 뒤떨어졌다.

그러나 시민들이 모두 참정권을 가지고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받는 등 아테네와는 다른 그들 나름의 민주 정치가 이루어졌다.

 

ㅡ 페르시아 전쟁 ㅡ

 

그리스의 도시 국가가 번영해 가고 있을 무렵 동쪽의 페르시아 제국은 오리엔트를 통일 하고 서쪽으로 세력을 뻗쳐 소아시아까지 정복하였다. 이리하여 두 세력은 에게 해를 사이에 두고 대립하게 되었다.

기원전 5세기 초에 페르시아에 정복당한 아오니아의 그리스 인들이 독립 운동을 일으키자, 아테네 등이 이를 후원해 주었다. 이에 화가 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이 그리스를 침입함으로써 네 차례에 걸친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났다.

제 1차는 기원전 492년에 다리우스 대왕이 보낸 페르시아 원정군이 트라키아 해안까지 침입했다가 물러갔다.

제2차는 기원전 490년에 역시 다리우스 대왕이 보낸 원정군이 에게 해를 건너 그리스 본토에 침입했으나, 유명한 마라톤 싸움에서 아테네 군에게 참패를 당하였다.

제 3차는 기원전 480년에 다리우스 대왕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 본토에 쳐들어왔다. 이 때 페르시아 육군은 테르모필레 요새를 지키던 그리스 군을 격파하고 아테네 시를 불살랐으나, 해군은 살라미스 해전에서 명장 테메스토클레스가 지휘하는 아테네 군에게 패배함으로써 의욕을 상실하고 물러갔다.

제 4차는 기원전 479년에 그리스를 공격하였으나 육해군 모두 패하여, 결국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의 승리로 끝났다.

페르시아 전쟁은 동양과 서양간의 첫 대결이었고, 서양의 자유주의가 동양의 전체주의를 꺾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ㅡ 아테네의 전성 ㅡ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한 아테네는 그리스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더욱이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보복에 대비하여 기원전 477년에 스파르타를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 국가와 델로스 동맹을 맺고, 이들 도시 국가를 사실상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아테네에는 정치가 페리클레스가 나와서 정치를 훌륭하게 이끄는 한편, 문화를 보호 장려하여 아테네는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아테네의 거리는 아름다운 조각으로 장식되었고, 웅대한 신전과 극장 등이 세워졌다. 서양 미술 최고 걸작으로 일컫어지는 파르테논 신전도 이 때에 세워졌으며, 국가적 행사인 ‘디오니소스 제전’ 때에는 연극이 상연되는 등 시민 생활에 활기가 넘쳤다. 문학과 학문도 크게 발달하여 많은 시인과 학자가 쏟아져 나왔다.

 

페리클레스의 지도 아래 아테네의 민주 정치는 마침내 완성을 보았다. 18세 이상의 모든 남자 시민에게 참정권이 주어지고, 그들이 직접 참가하는 민회(民會)가 국가의 최고 의결 기관이 되었다. 또한 국가 공무원이나 재판관도 희망자 중에서 추천으로 뽑았다.

이와 같이 아테네의 민주 정치는 입법 · 행정 · 사법 등 모든 부문에 걸쳐 시민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다. 곧 오늘날과 같은 간접 민주 정치가 아니라, 직접 민주 정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자와 노예는 참정권이 없었다. 그 때 아테네에는 노예의 수가 성년 남자 시민의 2.5배 쯤 되었으므로 전체 인구의 극히 일부만이 민주주의를 누린 셈이다.

 

ㅡ 그리스의 쇠퇴 ㅡ

 

아테네는 페리클레스 시대에 그리스 세계의 지배권을 잡고 크게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다른 도시 국가들을 속국처럼 다루었으므로 차츰 그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이에 아테네의 번영을 시기하며 기회를 엿보던 스파르타는 여러 도시 국가들을 부추겨서 아테네에 도전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의 모든 나라가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두 편으로 갈라져 오랫동안 싸움을 벌였는데, 이를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 기원전 404년)이라고 한다.

 

전쟁 초기에는 재해권을 잡고 있던 아테네가 우세했으나, 페스트(흑사병)가 크게 번져 많은 시민이 죽어 갔다. 또 지도가인 페리클레스가 죽자, ‘선동 정치가’들이 나타나 공연히 민중을 선동하여 정치를 그르치고, 작전상으로도 실패를 거듭하여 마침내 아테네의 패배로 전쟁이 끝났다. 이 전쟁은 그리스의 전농토를 황폐하고 만들고, 각 도시 국가의 국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전쟁후 얼마 동안은 스파르타가 패권을 잡고 다른 도시 국가들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그리스 중부의 도시 국가인 테베에게 패하여 패권을 잃고 말았다. 그 후에도 도시 국가들의 세력 다툼이 계속되었으므로 그리스는 점점 쇠퇴해 갔다.

 

 

ㅡ 마케도니아 왕국 ㅡ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이 세력 다툼에 몰두하고 있을 때, 북쪽에서는 마케도니아 왕국이 국력을 키우고 있었다.

마케도니아 인은 원래 그리스 인과 같은 계통의 민족이었다. 그러나 문화가 뒤떨어지고 풍속도 달라서, 그리스 인으로부터 차별과 멸시를 받아 왔다.

그런데 마케도니아는 기원전 4세기 중엽에 야심 만만한 필리포스 왕이 즉위하면서 은광의 개발 등으로 차츰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그는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이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내분으로 쇠퇴해진 그리스에 침입하였다. 그리하여 기원전 338년에 아테네 · 테베 등의 그리스 연합군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무찌르고 그리스 전체를 지배하였다.

그 후 필리포스 왕은 동쪽의 페르시아 제국까지 정복하려고 계획하다가 신하에게 암살 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야망은 아들인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실현되었다.

 

ㅡ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 ㅡ

 

20세의 젊은 나이로 왕위에 오른 알렉산더 대왕(재위 기원전 336~기원전 323년)은 부왕의 암살로 빚어진 혼란을 수습한 후 마케도니아 · 그리스의 연합군 3만여 명을 거느리고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다(기원전 334년).

그는 소아시아로 진군하여 다리우스 3세가 이끄는 페르시아 대군을 이수스 전투에서 격파하고, 시리아를 거쳐 이집트를 정복하였다. 그리고 나일 강 하구에 자기 일므을 딴 새로운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였다.

 

이어 페르시아 본국으로 진격하여 아르벨라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적국의 서울인 페르세폴리스와 수사를 차례로 점령하였다. 참패를 당한 다리우스 3세는 도망가다가 신하에게 암살되어 페르시아 제국은 완전히 멸망하였다(기원전 330년).

알렉산더 대왕은 정복지 곳곳에 ‘알렉산드리아’라는 같은 이름의 도시를 세우면서 동쪽으로 계속 진격하여 인더스 강 유역에까지 이르렀다.

이리하여 불과 10년 동안에 서쪽의 그리스 · 이집트로부터 동쪽의 인도 서북부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은 광대한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세 서울을 바빌론에 정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동양 여자와 결혼하고, 부하 장병 1만 명을 페르시아 여자와 결혼시켰다. 또 페르시아 풍속을 받아들이고, 오리엔트식의 전제 국가를 세우려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새로 건설한 도시에 그리스 인을 이주시킴으로써 그리스 문화를 오리엔트 지방에 보급시키는 데 힘썼다.

이것은 하나의 세계를 만들려는 대왕의 원대한 꿈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인종과 문화까지도 하나로 만들려고 했었다. 그러나 원정이 끝난 이듬해에 열병에 걸려 쓰러졌다. 그의 나이 33세 때였다.

 

로마 제국

 

ㅡ 도시 국가 로마 ㅡ

 

인도ㅡ유럽 어족이 그리스 땅에 이동해 올 무렵, 그 일파가 이탈리아 반도에도 옮겨 와서 이탈리아 인을 이루었다.

얼마 후 이탈리아 인의 한 갈래인 라틴 족이 티베르 강 유역에 로마라는 도시 국가를 세웠는데, 전설상의 건국 연대는 기원전 753년으로 되어 있다.

그 당시 이탈리아 반도에는 여러 민족이 살고 있었다. 북부에는 민족 계통이 확실치 않은 에트루리아 인, 중부에는 이탈리아 인, 남부에는 그리스 인 등 민족 분포가 복잡하였다.

로마는 처음 이웃 나라인 에트루리아 왕의 지배를 받았으나, 기원전 6세기 말에 독립하여 공화국을 이루었다.

로마의 공화정 초기에는 귀족들이 정치를 독차지하였다. 곧 귀족 중에서 선출된 2명의 집정관이 행정을 맡고 귀족 대표 300명으로 구성되는 원로원이 입법을 맡았다.

원로원은 최고 의결 기관인 동시에 국정의 감독 기관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국가의 모든 권력을 독점한 귀족에 대하여 평민들의 불만이 높아져, 기원전 494년에는 평민들이 로마를 떠나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려 하였다.

이에 귀족의 양보로 평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호민관 제도가 마련되고, 또 관습법을 문자로 기록한 12표법도 만들었다. 초기의 법률은 관습법이어서 귀족만 알고 그들만이 마음대로 해석하여 평민에게는 불리하였는데, 12표법의 계정으로 누구나 공평하게 법률의 적용을 받게 되었다.

그 후에도 평민을 보호하는 법률이 차례로 재정되어, 기원전 3세기 초에는 귀족과 평민이 거의 동등한 권리를 가졌다.

한편 로마는 영토 확장에도 힘써, 정치의 민주화가 완성될 무렵에는 이탈리아 반도를 완전히 통일하였다.

 

ㅡ 포에니 전쟁 ㅡ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로마는 지중해로의 진출을 꾀하였다. 당시 지중해의 해상권은 페니키아 인의 도시 국가 카르타고가 잡고 있었으므로, 두 나라의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지중해 건너편의 아프리카에 위치한 카르타고는 서지중해 일대에 세력을 떨쳐 시칠리아 섬가 에스파냐 등을 지배하고 있었다.

결국 로마와 카르타고는 서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놓고 세 차례에 걸쳐 싸움을 벌였는데, 이것이 유명한 포에니 전쟁이다. 포에느란 라틴 어로 페니키아를 가리킨다.

제 1차 싸움(기원전 264~기원전 241)은 로마가 승리하여 시칠리아 섬 전체를 손에 넣었다.

제 2차 싸움(기원전 218~기원전201년)에서는 복수를 꾀하는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에 침입하여 한때 로마를 곤경에 빠드렸다. 그러나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가 카르타고 본국으로 쳐들어가,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 군을 격파함으로써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제 3차 싸움(기원전 149~기원전 146)에서도 로마 군이 카르타고를 3년 동안이나 포위 공격한 끝에 완전히 멸망시켰다. 110여 년에 걸친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나고, 카르타고의 세력하에 있던 여러 지역을 로마가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로마는 지중해 일대를 지배하는 대제국으로 발전하였다.

 

ㅡ 무너지는 공화 정치 ㅡ

 

로마의 잇따른 정복 전쟁과 해외 발전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병사로서 전쟁에 참가한 농민들은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는데다 정복지로부터 값싼 곡물이 대량으로 수입되어, 가난에 쪼들린 끝에 몰락하는 수가 많았다.

이와는 반대로 군대의 사령관이나 속주(정복지)의 총독이 된 귀족들은 정복 전쟁과 속주 통치를 통해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이들은 몰락한 농민들의 토지를 사 모으거나 국가 공유지를 멋대로 차지하고, 전쟁 포로를 노에로 부리면서 대농장을 경영하였다. 이러한 대토지 소유제를 라티푼디움이라 한다.

라티푼디움의 발달은 빈부의 차이를 더욱 크게 하였으며, 평등한 시민의 기초 위에 성립되었던 로마의 공화 정치를 위기에 빠뜨렸다.

기원전 2세기 후반에 호민관이 된 그라쿠스 형제는 이러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귀족들이 차지한 공유지를 몰수하여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는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귀족들의 미움을 사서 형은 암살되고, 동생은 반대파와의 싸움에 패하여 자살하였다.

그 후 로마 사회는 경제적 불평등이 확대되는 가운데, 원로원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파와 이에 대항하는 평민파 아이에 당파 싸움이 일어나 공화 정치의 상징이었던 원로원도 차츰 권위를 잃어 갔다.

 

ㅡ 시저의 독재 ㅡ

 

기원전 1세기에 접어들자, 로마의 지배를 받던 이탈리아 도시들이 반기를 들고, 또 노예의 대반란이 일어났다. 이 같은 혼란 속에서 유력한 장군들이 나타나 권력을 잡았다.

기원전 60년, 노예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폼페이우스가 시저(카이사르) · 크라수스와 결탁하여 로마 영토를 셋이서 나누어 다스리기로 하고, 이른바 3두 정치를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장군이었던 시저는 난폭한 미개 민족이 살던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방을 정복함으로써 이름을 크게 떨쳣다. 이를 시기한 폼페이우스는 원로원과 손을 잡고 시저를 제거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시저가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와 폼페이우스를 몰아내고 정권을 독차지하였다.

시저는 정치가로서도 훌륭한 솜씨를 발휘하였다. 그는 실업자를 구제하고 속주의 주민에게도 시민권을 주는 등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했으며, 이집트의 태양력을 기초로 한 ‘율리우스력’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공화 정치의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그가 황제에 오르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고 의심하였다. 그리하여 기원전 44년, 브루투스 등 공화파에 의해 암살되었다.

 

ㅡ 로마 제정의 성립 ㅡ

 

독재자 시저가 죽은 뒤, 그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와 부하였떤 안토니우스, 그리고 정치가인 레피두스 등 세사람이 제 2회 3두 정치를 시작하였다(기원전 43년). 그러나 얼마 후 레피두스가 세력을 잃자, 안토니우스는 로마 영토의 동부를, 옥타비아누스는 서부를 지배하면서 서로 대립 상태를 이루었다.

이 때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결혼하고, 로마의 일부 영토를 선물로 주었다. 안토니우스의 이와 같은 국가에 대한 반역 행위를 그냥 둘 수 없다고 하여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 정벌에 나섰다.

그리하여 기원전 31년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 ·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쳐부수고 이집트를 완전히 로마 영토로 만들었다.

로마에 개선한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7년에 원로원에서 첫째 자리인 프린켈스(제1시민이란 뜻)라는 지위와 아우구스투스(존엄자란 뜻)라는 칭호를 받고, 정치 · 군사상의 실권을 한손에 쥐었다.

그는 시저의 실패를 거울삼아 공화 정치의 질서를 존중하여 원로원과 공동 통칠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사실상 황제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로마는 이 때부터 제정 시대(로 들어갔따.

아우구스투스는 실업자 구제 등 내정에 힘쓰는 한편, 로마 시민의 긍지와 국가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 학문과 예술을 장려하고, 로마 시를 아름답게 꾸몄다. 그리하여 로마 문화의 황금 시대가 이룩되고, 벽돌의 로마가 대리석의 로마로 모습을 바꾸었다.

 

ㅡ 로마의 평화 ㅡ

 

로마 제국은 아우구스투스 이후 약 200년 동안 훌륭한 황제들이 뒤를 이으면서 통치에 힘썼으므로 ‘로마의 평화’로 불리는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맞았다. 특히 네르바 황제로부터 아우렐리우스 황제에 이르는, 이른바 5현제 시대(96~180년)는 로마 제국의 절정기로 영토가 최대로 확장되었으며, 정치적 안정과 함께 문화도 융성했다.

당시 로마 제국의 영토는, 동쪽은 유프라테스 강에서부터 서쪽은 대서양 연안까지, 그리고 남쪽은 사하라 사막에서부터 북쪽은 다뉴브 강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대제국은 그 후 유럽에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한편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수도 로마와 각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가 거미줄처럼 만들어지고, 곳곳에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었다.

이에 따라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고, 인도를 비롯한 동남 아시아 나라들과도 무역을 하였다. 그리하여 동남 아시아의 향신료(후추 등)와 중국의 비단 등이 대량으로 수입되어 귀족들의 사치품으로 이용되었다.

 

ㅡ 사회 혼란과 국가 중흥 ㅡ

 

그처럼 번영을 누리던 로마 제국도 5현제 시대가 끝난 2세기 말부터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오랜 태평소게서 점차 향락과 사치 풍조가 일어나 로마 사회를 병들게 했으며 정치도 갈수록 문란해졌다. 이를 틈타 군인들이 정치에 관여하여 횡포를 부렸다.

그리하여 약 50년 동안에 30명 가량의 황제가 군대에 의해 태어나고 살해되었다. 이러한 군인 황제 시대(235~285)를 겪으면서 황제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국방력도 크게 약화되었다. 한편 북방의 게르만 족과 동방의 페르시아(사산 왕조)가 자주 침입하여 로마 제국은 나라 안팎으로 위기에 부딪쳤다.

이러한 난국을 수습하고 국가 중흥에 힘쓴 사람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였다. 그는 오리엔트식의 강력한 전제 정치 체제를 확립하고,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하였다(3세기 말),

그의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 동안 금지외어 온 크리스트 교를 공인하여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전제 정치를 한층 강화하였다. 330년에는 서울을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콘스탄티노플이라 고쳤다.

 

ㅡ 로마 제국의 분열과 멸망 ㅡ

 

정치적 변동이 거듭되는 가운데 로마의 사회 · 경제 상태도 변화되어 갔다.

정복 전쟁이 끝나 노예를 얻을 수 없게 된 대지주들은 노예를 부려서 농장을 경영하던 방법을 바꿔, 농민들을 소작인으로 삼아 토지를 빌려 주고 지대(소작료)를 받아들였다.

따라서 이들 소작인은 이동의 자유를 잃고 반 노예가 되어 콜로누스라 불리었다.

한편 콜로누스 제도가 발달함에 따라 농민을 지배하여 국가 권력에 복종하지 않는 호족(세력가)들이 각지에 생겨 국가의 지배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따라서 로마 제국의 지방 통제력은 점점 약화되어 갔다. 더구나 4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게르만 족의 대이동이 일어나면서 로마 제국 안으로 밀려들어와 큰 혼란에 빠졌다.

당시의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크리스트 교를 국교로 삼고 전제 정치를 강화하여 혼란을 수습하려 했지만, 때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그는 대제국을 한 정부 밑에 다스리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고, 죽을 때 로마의 전영토를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따라서 로마 제국은 동서로 갈라졌다(395년).

콘스탄티노플을 서울로 정한 동로마 제국은 그 후 약 1,000년 동안 명맥을 이어갔으나, 로마를 서울로 정한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 족의 침입을 받아 476년에 멸망하였다.

 

 

중세 유럽의 세계

 

ㅡ 게르만 족과 그 사회 ㅡ

 

로마 제국이 쇠퇴하자 게르만 족이 로마인을 대신하여 유럽 세계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게르만 족은 로마 제국이 번영하고 있을 때, 로마 제국의 국경선이던 라인 강과 다뉴브 강의 북쪽에서 수십 개의 부족(국가)으로 나누어져 살고 있었다. 이들 부족은 저마다 왕이나 추장의 다스림을 받았다. 그리고 왕의 선출 가튼 중요한 일은 모든 자유민이 모이는 민회에서 결정하였다.

한편 귀족들은 많은 토지와 가축 및 노예를 소유하고 평민(자유민)들을 종사로 삼아 그들에게 무기와 침식을 제공해 주는 대신 군사적인 봉사를 받았다. 이와 같은 게르만의 종사 제도가 뒷날 서유럽 봉건 제도의 바탕이 되었다.

게르만 족은 목축을 주업으로 삼고 농사도 지었으나, 식량 등이 충분하지 못하여 자주 로마 영토에 침입하였다.

 

ㅡ 게르만 족의 대이동 ㅡ

 

4세기 후반, 아시아의 유목민인 훈 족의 유럽 침입을 계기로 마침내 게르만 족의 대이동이 일어났다.

훈 족의 침입을 받은 서고트 족은 흑해 연안에서 서쪽으로 이동, 375년에 다뉴브 강을 건너 로마 제국으로 침입하였다. 이에 게르만의 다른 부족들도 자극을 받아 일제히 로마 제국으로 밀려들었다.

서고트 족은 이탈리아에 침입하여 한때 로마를 점령했으며, 그 후 에스파냐로 옮겨 가 왕국을 세웠다.

이와 같은 혼란 속에서 서로마 제국은 476년에 게르만 인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에게 망하고, 오도아케르도 동고트 왕 테오도리크에게 패하여, 이탈리아는 한때 동고트의 지배하에 있었다.

한편 프랑크 족이 라인 강 유역에서 프랑스 지방 북부로 서서히 번져 갔으며, 앵글 족과 색슨 족은 5세기 전반에 잉글랜드로 건너가 원주민인 켈트 족을 정복하고 여러 개의 소왕국을 세웠다.

이리하여 서유럽은 약 2세기 동안에 걸쳐서 민족 대이동의 물결에 휩쓸려 암흑 세계를 이루었다.

 

ㅡ 프랑크 왕국의 발전 ㅡ

 

서유럽 각지에 게르만 족이 세운 나라들은 대부분 오래 가지 못하고 무너졌다. 멀리 이동해 온 소수의 정복자가 문화적으로 앞서 있는 다수의 원주민(로마 인)을 지배해 나가기가 힘에 겨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주지를 떠나지 않고 갈리아 지방에 퍼져 나간 프랑크 족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프랑크 족은 그들의 전통을 간직하면서 원주민과 융합하여 발전할 수 있었다.

5세기 말에 ‘메로빙거 집안’의 클로비스가 프랑크 족을 통일하고 왕국을 세웠다. 클로비스는 로마 교회의 교리를 받아들여 카톨릭 교를 믿었는데, 이것이 프랑크 왕국 발전의 커다란 요인이 되었다. 프랑크 왕국은 카톨릭 신자들인 원주민과 교회의 협조를 받아 다른 게르만 족들을 정복하면서 영토를 넓혀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메로빙거 왕조는 7세기 말부터 쇠퇴하고 귀족이 실권을 잡았다.

귀족의 대표자인 카를 마르텔은 에스파냐로부터 침입해 온 이슬람 군을 두르ㅡ푸아티에 전투에서 격파하여, 프랑크 왕국과 크리스트 교를 수호하였다(732년)

그의 아들 패팽은 로마 교황의 지지를 얻어서 751년 왕위에 올라 카롤링거 왕조를 열었다. 그리고 그는 교황을 위협하던 랑고바르트 왕국을 쳐서 정복한 일부 영토를 교황에게 바쳤다. 이리하여 로마 교황과 프랑크 왕국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ㅡ 프랑크 왕국의 분열 ㅡ

 

프랑크 왕국은 카를 대제의 손자대에 이르러 영토 상속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나 3국으로 분열되었다.

카를 대제의 아들 루트비히가 죽자, 그의 세 아들 사이에 상속 분쟁이 거듭된 끝에 베르됭 조약(843년)이 맺어져, 장남 로타르는 이탈리아와 중부 프랑크를, 차남은 동프랑크를, 3남은 서프랑크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로타르가 죽은 뒤 두 동생의 강요로 다시 메르센 조약(870년)이 맺어져, 중부 프랑크를 서로 나누어 가졌다. 이리하여 프랑크 왕국은 동프랑크(지금의 독일) · 서프랑크(지금의 프랑스)·이탈리아의 세 나라로 갈라졌다.

서프랑크에서는 10세기 말에 카롤링커 왕조의 혈통이 끊어졌으므로, 제후(대영주)들은  위그 카페를 왕으로 받들었다. 그리하여 카페 왕조가 세워졌으나, 왕권이 약하여 파리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에 불과하였다.

동프랑크에서도 10세기 초에 카롤링거 왕조가 끊어진 뒤, 유력한 제후들이 왕을 선출하게 되었다. 그 세 번째 왕이 된 오토 1세는 이탈리아에 원정하여 교황을 도와 준 공로로 962년에 ‘신성 로마 황제’의 관을 받았다.

이 때부터 독일은 신성 로마 제국이라 불리었고, 독일 왕은 황제의 지위와 이탈리아 왕을 겸하였다. 그러나 독일 황제들은 이탈리아를 지배하는 일에 골몰하여 국내 정치를 소홀히 했기 떄문에 나라 안이 어지러웠다.

한편 이탈리아는 이미 875년에 카롤링거 왕조가 끊긴 뒤 분열 상태가 계속되었다. 교황을 비롯하여 여러 제후와 도시들이 대립해 있는데다가 오토 1세 이후로는 독일 황제의 간섭까지 겹쳐서 더욱 혼란을 빚었다.

 

ㅡ 영국의 기원 ㅡ

 

영국에는 기원전 6세기 경부터 켈트 족이 옮겨 와 살았는데, 기원저 1세기에 시저의 원정으로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그 후 민족 대이동 때, 앵글 족과 색슨 족이 침입하여 켈트 족을 몰아내고 영국을 그들의 땅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처음 작은 왕국을 여러 개 세웠지만, 6세기 말에 7왕국으로 통합되었다. 9세기에는 그 중의 하나인 웨섹스에 의해 통일이 이루어져 잉글랜드 왕국(앵글로색슨 왕국)이 성립하였다.

9세기 말의 앨프레드 대왕은 데인 족(덴마크에 살던 노르만 족의 일파)의 잇따른 침입을 격퇴시키는 한편, 법전을 편찬하고 문예를 장려하는 등 영국의 고대 문화 발전에도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그 후 영국은 노르만 족에게 정복되긴 했지만 앵글로색슨 족의 문화와 전통이 계승되었다. 그래서 영국 민족을 앵글로색슨 족이라 하고, 나라 이름도 ‘앵글 족의 땅’이란 뜻에서 잉글랜드라 하였다.

한편 켈트 족은 앵글로색슨 족에 의해 아일랜드로 쫓겨갔으며, 그 곳에서 독립을 유지하였다.

 

ㅡ 노르만 족의 활동 ㅡ

 

프랑크 왕국이 집안 싸움으로 혼란에 빠졌을 무렵, 서유럽 세계는 북쪽의 노르만 족, 동쪽의 마자르 족, 남쪽의 이슬람 교도의 침입을 받아 큰 고통을 겪었다. 그 중에서도 노르만 족에 의한 타격이 가장 컸다.

게르만 족의 한 갈래인 노르만 족은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유틀란트 반도에 살면서 주로 어업에 종사했으므로 항해에 능하였다. 그들은 독특한 모양의 날쌘 배를 만들어 타고 유럽 각지를 휩쓸면서 노략질을 하였다. 그래서 당시의 유럽인들은 그들을 바이킹이라 부르며 두러워하였다.

노르만 족은 인구가 증가하자, 각지에 진출하여 땅을 뺴앗고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912년에 롤로가 이끄는 바이킹의 무리는 프랑스에 침입하여 센 강 하류 지역에 노르망디 공국을 세웠다. 바이킹의 침략을 막을 수 없었던 서프랑크 왕은 그들이 정착하도록 허락해 주었던 것이다.

그 후 노르망디 공국은 우두머리인 윌리엄의 지휘 아래 영국을 정복하여 노르만 왕조를 열었으며(1066년), 지중해에도 진출하여 시칠리아 왕국을 세웠다.

또 노르만의 다른 갈래는 동쪽으로 나아가 슬라브 족을 정복하였다. 뿐만 아니라 노르만 족 중에는 아이슬란드, 그린란드를 거쳐 멀리 북아메리카에까지 진출한 무리도 있었다. 이것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약 500년 전의 일이었다.

한편 노르만 족의 일부는 원주지에 그대로 남아 11세기까지 노르웨이 · 스웨덴 · 덴마크의 3왕국을 세웠다.

 

ㅡ 러시아의 건국 ㅡ

 

게르만 족의 대이동이 있은 지 얼마 뒤, 동쪽에 살던 슬라브 족도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게르만 족과 같은 인도ㅡ유럽 어족에 속하는 슬라브 족은 일찍부터 러시아 평원에 살고 있다가 동유럽 일대로 퍼져 나갔다.

그 중 서쪽으로 이동한 무리는 뒤에 폴란드인 · 체코슬로바키아인(체코인 · 슬로바키아인)이 되었고, 남쪽의 발칸 반도로 이동한 무리는 지금의 유고슬라비아에 사는 세르비아인 · 크로아티아인 등이 되었다. 그리고 일부는 원주지에 그대로 남아 러시아 인이 되었다.

그런데 862년 노르만 족의 한 갈래인 루스 족이 족장 루릭의 지휘 아래 러시아에 침입하여 슬라브 족을 정복하고 노브고로드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러시아 최초의 국가다. 러시아(Russia)란 말은 루스(Russ)족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노브고로드 공국은 얼마 후 키예프로 도읍을 옮겼으므로 키예프 공국이 되었다. 그러나 정복자인 노르만 인은 차츰 원주민에게 동화되어 키예프 공국도 러시아 인의 나라가 되었다.

 

ㅡ 동로마 제국 ㅡ

 

유럽 동부에 치우쳐 있던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은 민족 대이동의 혼란을 면하고,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약 1,000년 동안이나 나라를 잘 유지하였다.

특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재위 527~565년) 때가 전성기로, 이탈리아의 동고트 왕국과 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을 멸망시켜 옛 로마 제국의 영토를 거의 되찾았다. 또 그는 법률학자 트리보니아누스 등에게 명하여 세계 3대 법전의 하나로 꼽히는 <로마법 대전(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케 했으며, 수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 웅장한 성 소피아 성당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랑고바르크 족에게 이탈리아를 빼앗기고, 7세기에는 페르시아(사산 왕조)와의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소모된 끝에 이슬람 교도의 침략을 받아 시리아와 이집트를 잃었다. 그리하여 8세기에 이르러서는 발칸 반도 일부와 소아시아만을 차지한 조그만 나라가 되고 말았다.

동로마 제국은 민족 대이동 후, 서유럽 세계가 형성되던 시기에 동방으로부터의 침략 세력을 막아 주는 방파제 구실을 훌륭히 해 내었다.

문화면에서는 옛 그리스 문화를 부활시켜 이를 서유럽에 전하는 구실을 하였다. 도 로마와 페르시아 문화를 융합하여 둥근 지붕(돔)과 모자이크 벽화를 특징으로 하는 비잔틴 미술을 발달시켰는데, 성 소피아 성당이 대표적인 것이다.

비잔틴 문화는 그들의 종교(그리스 정교)와 함께 동유럽의 슬라브 족들 사이에 전파되어 서유럽과는 다른 문화권을 이루게 하였다.

 

ㅡ 높아지는 교황의 권위 ㅡ

 

교회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주교 · 수도원장 같은 성직자는 막대한 토지를 차지하여 봉건 귀족(제후·영주)과 같은 지위를 누렸다.

그리하여 종교와 정치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분쟁이 일어났다.

그 때까지 성직자의 임명권은 거의 왕이나 제후가 가지고 있었으며, 신성 로마 황제(독일 국왕)는 오토 1세 이래 교황마저 임명해 왔다. 따라서 교황은 황제의 지배를 받는 처지였다.

그러나 교회의 혁신 운동을 강력히 추진했던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교황의 절대건을 내세워 군주나 제후가 성직자를 임명하지 못하게 하였다. 성직자 임명권을 빼앗긴다는 것은 국가 통치상 커다란 타격이었으므로, 당시의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이에 반대하여 다툼이 일어났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마침내 황제를 파문했으며, 황제는 교항의 폐위를 선언하며 이에 맞섰다. 그러나 독일의 많은 제후들이 교황 편을 들었으므로, 궁지에 몰린 황제는 북이탈리아의 카노사 성을 교황을 찾아가 용서를 빌어서 겨우 파문을 면하였다.

이것을 카노사의 굴욕(1077년)이라 하는데, 교황의 절대적 권위를 나타내 보인 사건으로 유명하다. 그 후 교황의 권위는 점점 높아져 십자군 운동을 주도하면서 그 위세를 전유럽에 떨쳤다.

 

십자군 운동과 그 영향

 

ㅡ 십자군의 성립 ㅡ

 

교황의 권위가 높아진 11세기에는 봉건 제도의 기초 위에 서유럽 사회가 안정기에 접어든 시대였다. 농업 생산의 증가로 상업이 발달하고, 이에 따라 새로운 도시가 각지에 생겨났다. 이러한 때 일어난 것이 십자군 운동이다.

원래 크리스트 교도들 사이에는 예수의 무덤이 있는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트 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은 7세기 이래 이슬람 세력의 지배하에 있었다.

11세기 후반에는 이슬람 교도인 셀주크 투르크 족이 소아시아에까지 진출하여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는 한편, 크리스트 교도의 성지 순례를 방해하였다.

 

이 때 셀주크 투르크에게 수도 콘스탄티노플까지 위협받게 된 동로마 황제는 로마 교황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당시의 교황 우르반 2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동로마 제국에까지 교세를 확장하려 하였다. 그는 1095년에 클레르몽 공의회를 소집하고, 같은 크리스트 교의 나라인 동로마 제국에 대한 지원과 이교도로부터의 성지 탈환을 호소하였다. 이에 감동된 각국의 제후와 기사들이 일제히 호응함으로써 십자군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1096년부터 1270년까지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 원정이 여러 차례 거듭되었다.

십자군 운동이 이렇게 오랫동안 대규모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서유럽인들의 열렬한 신앙심에 일차적 원인이 있었지만, 봉건 제도하에 사회가 안정되면서 경제적 발전과 함께 밖으로의 진출 의욕이 강하게 작용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이탈리아의 상인들은 십자군을 이용하여 동방 무역의 확대를 꾀하였다.

 

ㅡ 십자군의 경과 ㅡ

 

서유럽 각국에서 모여 온 제후 · 기사 · 농민들은 가슴에 십자가 표시를 하고 성지 회복을 위한 원정길에 올랐다.

제 1회 십자군 (1096~1099년)은 일단 목적을 달성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세웠다. 얼마 후, 예루살렘이 셀주크 투르크의 위협을 받아 제 2회 십자군(1147~1149년)이 파견되었고, 다시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집트(아이유브 왕조)의 살라딘을 치기 위하여 제 3회 십자군(1189~1192년)이 출정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돌아왔다.

 

제 4회 십자군(1202~1204년)은 동방 무역의 패권을 자으려는 베네치아 상인들의 책동에 말려들어 엉뚱하게도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였다.

제 5회 십자군(1228~1229년)은 이슬람 교도의 내분을 틈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으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하였다.

제 6회(1248~1254년)와 제 7회(1270년)는 예루살렘이 아닌 이집트와 튀니스를 원정하고 돌아왔다.

 

이처럼 십자군의 원정은 7회까지 거듭되었는데, 일시적이나마 목적을 달성한 것은 두번뿐이었다. 날이 갈수록 종교적인 순수심을 잃고 정치적 야심이나 경제적 이익 추구에 기울어져, 마침내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ㅡ 십자군의 영향 ㅡ

 

십자군 원정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유럽 사회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그 영향을 대략 간추려 본다.

첫째, 교황의 주도로 행해진 십자군 원정이 실패함으로써 교황의 권위가 떨어지고, 교도들의 신앙심도 약해졌다.

둘째, 원정에 참가한 제후 · 기사들의 몰락으로 봉건 세력이 약화되었으며 그 대신 왕권이 강화되면서 중앙 집권적인 근대 국가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셋째, 십자군 원정으로 동방과의 교통이 열러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는 동방 무역이 활발해졌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유럽 각지에서 상업과 도시의 발달이 촉진되었다.

넷째, 십자군을 통하여 서유럽 인들의 시야가 넓어지고, 동방 이슬람 문화와의 접촉으로 서유럽 문화에 새로운 기운(르네상스)이 일어나게 되었다.

 

ㅡ 교황권의 쇠퇴 ㅡ

 

십자군 운동은 교황의 제창으로 일어났고, 처음에는 성공도 거두었으므로 교황의 권위를 한층 높여 주었다. 그리하여 13세기 초의 이노센트 3세 때에는 교황권이 절정을 이루어 유럽의 모든 군주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십자군의 실패로 흔들리기 시작한 교황의 권위는 왕권 강화에 따라 점점 더 쇠퇴하게 되었다.

14세기 초에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와 싸워 굴복시킨 후, 교황청을 남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겨 버렸다(1309년), 이로부터 약 70년동안 교황은 프랑스 왕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그 후 로마에도 또 다른 교황이 생겨 서로 대립하는 상태를 이루었다. 이를 교회의 대분열(1378~1417)이라 한다.

이리하여 교황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자, 전부터 교회의 부패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사람들 사이에서 개혁을 부르짖는 소리가 높았다. 그러한 가운데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신학 교수였던 위클리프는 성직자의 타락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성서에 바탕을 둔 개혁’을 주장하였다. 이에 영향을 받은 보헤미아(지금의 체고슬로바키아)의 후스도 개혁 운동을 일으켜 민중들 사이에 커다란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당황한 교회는 1414년에 콘스탄츠 공의회를 열어 후스를 이단자로 몰아 처형하는 한편, ‘교회의 대분열’을 수습하였으나 교회의 권위를 회복할 수는 없었다.

 

중앙 집권 국가의 출현

 

ㅡ 근대 국가의 싹틈 ㅡ

 

중세 유럽의 봉건 사회는 십자군 전쟁을 고비로 차츰 무너지고 근대 국가가 싹트기 시작했다. 근대 국가의 특징은 중앙 집권적인 민족 국가다. 권력을 중앙(왕)으로 한데 모으는 것이 중앙 집권이며, 민족이 하나로 뭉쳐서 이룩된 나라가 민족 국가다.

근대 국가의 성립은 십자군 시대부터 새로 나타난 도시의 상공업자와 관련이 깊다. 이들 상공 시민은 국가가 분열되어 있는 것보다는 하나의 사회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 그들의 활동에 유리하였으므로 국왕의 중앙 집권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한편 국왕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공업자의 재정적인 후원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보호하였던 것이다.

또한 근대 국가는 기독교 사상으로부터 벗어났으므로 사회의 분위기가 자유로웠다. 그리하여 문화적인 면에서는 문예 부흥이, 정신적인 면에서는 종교 개혁이 일어났다. 따라서 이 시대에 이르러 서양 사회는 눈부신 발전을 하여 정치 · 경제 ·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동양을 훨씬 앞질렀다.

 

ㅡ 영국 의회의 성립 ㅡ

 

영국은 헌법과 의회를 바탕으로 근대적인 민주 정치가 제일 먼저 싹튼 나라다.

영국은 근대 국가가 되면서 왕의 권한이 강화되자, 왕은 권력을 휘둘러 국민을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존 왕(재위 1199~1216년) 때에 이르러 왕의 권한은 제한을 받았다. 존 왕은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싸워 프랑스 안에 있던 영국 영토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교황 이노센트 3세와 대립하여 파문당함으로써 위신이 크게 떨어졌다. 또한 세금을 멋대로 올려 받는 등 실정을 거듭하였다.

이에 귀족과 대상인들이 단결하여 대헌장이라는 법률을 만들어 왕에게 이를 승인하도록 강요하였다(1215년). 이 대헌장은 왕의 권한을 제한하고 국민의 권리를 규정한 것으로서 영국 헌법의 시초가 되었다.

그 후 존 왕의 뒤를 이은 헨리 3세가 대헌장을 무시하고 다시 전제 정치를 실시하자, 귀족 대표 몽포르가 왕에게 대항하여 귀족 · 성직자 및 시민 대표로 구성된 의회를 소집하였다(1265년). 이리하여 처음으로 영국 의회가 성립되었다.

 

ㅡ 프랑스의 왕권 확대 ㅡ

 

프랑스는 10세기 말에 위그 카페가 왕위에 올라 카페 왕조를 열었으나, 봉건 세력이 강하여 왕권이 강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12~13세기 이후 도시가 발달하고 벙건 제도가 약해지면서 프랑스의 왕권은 점차 강화되어 나갔다.

카페 왕조의 제 7대 왕인 필리프 2세(재위 1180~1223년)는 영국의 존 왕과 싸워 프랑스 안의 영국 영토를 거의 빼앗았다. 이어 필리프 4세도 로마 교황을 굴복시킴으로써 프랑스 왕의 권위가 매우 막강해졌다.

그 후 1302년 필리프 4세는 교회가 소유한 재산에 세금을 부과하는 문제로 교황과 충돌하게 되자,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성직자 · 귀족 · 시민의 대표자로 구성되는 신분제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것이 삼부회의 시초이며, 그 후 왕의 정치에 대하여 강한 발언권을 행사하는 기관이 되었다.

삼부회는 사실상 프랑스의 의회로서 세금 부과에 대한 내용을 주요 의제로 하여 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구실을 하였으나, 점차 왕의 권력이 강화됨에 따라 삼부회의 권한은 약해져 갔다. 그리하여 삼부회의 소집은 루이 16세 때에 중단되어(1614년), 프랑스 혁명 때 까지 열리지 않았다.

 

ㅡ 백년 전쟁과 장미 전쟁 ㅡ

 

1328년 프랑스의 카페 왕조가 무너지자 발루아 왕가의 필리프 6세가 왕위에 올라 새 왕조를 열었다. 이 때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어머니가 카페 왕가 출신이라는 구실을 들어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왕 필리프 6세는 프랑스 안에 있는 영국 영토를 프랑스 영토로 몰수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에 영국왕은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에 침입하여, 이른바 백년 전쟁(1338~1453)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영국군이 우세하였다. 영국군은 크레시 전투를 비롯하여 곳곳에서 승리를 거두어 프랑스 국토의 반 이상을 점령하였다. 프랑스는 수도인 파리도 영국군에게 빼앗기고 최후의 근거지였던 오를레앙마저 포위당하여 멸망 직전의 위기를 맞았다.

이 때 기적이 일어났다. 잔 다르크라는 17세 소녀가 프랑스 군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용감히 싸워, 오를레앙을 포위한 영국군을 무찔렀던 것이다. 잔 다르크는 뒤에 영국군에게 사로잡혀 화형에 처해졌지만, 프랑스인들의 민족적인 자각심이 높아져서 마침내 영국군을 프랑스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

이 전쟁으로 프랑스는 많은 제후와 기사가 전사하거나 재산을 잃고 몰락하였다. 따라서 왕권이 강화되어 중앙 집권이 쉽게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영국에서는 백년 전쟁에 실패한 후, 제후들 사이에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장미 전쟁(1455~1485)이 일어났다.

장미 전쟁은 랭커스터 집안과 요크 집안 사이의 싸움으로, 두 집안이 각각 흰 장미와 붉은 장미를 집안 표시로 삼은 데서 이 이름이 생겻다. 이 전쟁은 헨리 7세가 요크 집안의 공주와 결혼하여 왕위에 올라 튜더 왕조를 엶으로써 끝났다. 그러나 이 전쟁으로 많은 봉건 귀족이 몰락하였다.

 

ㅡ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ㅡ

 

유럽 남부의 이베리아 반도는 8세기 초에 이슬람 교도에게 정복되어 지배를 받았다.

한편 이 곳에 살던 크리스트 교도들은 북쪽으로 밀려나 있었는데, 10세기 경부터 반격을 시작하여 차츰 국토를 회복하고 여러 개의 작은 나라를 세웠다. 이들 소왕국은 차차 통일을 이루어 카스티야 · 아라곤의 두 왕국을 이루었다.

15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라와 아라곤의 왕자 페르디난도가 결혼함으로써 두 나라를 합친 에스파냐 왕국이 성립되었다(1479년)

에스파냐는 국토 회복 운동을 벌이는 가운데 왕권이 강화되어 중앙 집권을 이룩하였으며, 1492년에 이슬람 교도의 최후 근거지였던 그라나다를 함락시킴으로써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로부터 완전히 몰아내었다.

한편 포르투갈은 본래 카스티야에 속해 있었으나 1143년에 카스티야로부터 독립하여 리스본을 수도로 정하고 왕국을 세웠다. 그 후 카스티야 · 아라곤 왕국과 더불어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중앙 집권적 국가를 이룩하는 데 노력하여 15세기 후반에는 귀족의 세력을 꺾고 왕권을 굳건히 하였다.

 

ㅡ 독일과 이탈리아 ㅡ

 

영국과 프랑스 · 에스파냐 등이 왕권을 강화하여 중앙 집권적인 근대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독일과 이탈리아는 아직도 분열 상태가 계속되어 근대 국가로의 발전이 더디었따.

독일은 10세기 이래 신성 로마 제국이라고 불리어 왔다. 당시의 독일왕 오토 1세(재위 936~973년)가 로마 교황을 도와 준 일로, 교황으로부터 ‘신성 로마 황제’라는 칭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교황의 권위가 당당하던 중세에는 독일왕, 곧 신성 로마 황제가 서유럽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오토 1세 이래로 독일의 황제들은 신성 로마 제국을 통한 로마 제국의 재건이라는 헛된 꿈에 쫓겨 국내의 통일은 돌보지 않았다. 그리하여 독일의 분열은 갈수록 심해져서 약 300개나 되는 크고 작은 제후 국가와 자유 도시로 갈라졌다. 이 같은 분열은 1870년 프로이센에 의해 독일이 통일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더구나 독일은 제후들이 모여 황제를 선출하였기 때문에 황제의 권한이 약했을 뿐만 아니라 한동안 황제가 없었던 시대, 곧 대공위시대를 겪기도 했다.

15세기 중엽부터는 오스트리아 지방의 큰 제후였던 합스부르크 집안에서 대대로 황제 자리를 잇게 되었지만, 독일을 통일할 만한 힘은 못 되었다.

한편 이탈리아는 북부 지방이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해 있었고, 중부는 로마 교황의 영토로 되어 있어서 통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또한 십자군 전쟁 때부터 베네치아 · 밀라노 · 피렌체 · 제노바 등 자유 도시가 번성하고 분열 상태가 더욱 심하였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지중해 무역에 종사한 결과 크게 번영하였으며, 문화적으로도 다른 나라에 앞서 새로운 문화를 개척하고 있었다.

 

ㅡ 그 밖의 여러 나라 ㅡ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해 있던 스위스는 14세기 말부터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집안에 대하여 독립 전쟁을 일으켰다. 15세기 말에는 마침내 독립하여 당시 유일한 연방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또한 스위스는 자유의 기풍이 남달리 강하였기 때문에 종교 개혁의 중심지가 되기도 하여다.

러시아는 13세기부터 200년간 몽고의 지배를 받아 왔다. 그러나 1480년에 모스크바의 제후였던 이반 3세(재위 1462~1505년)가 몽고족의 세력을 몰아내고 러시아를 통일하였다. 한편 동로마 제국이 투르크 족에게 멸망하자 그 계승자를 자처하면서 그리스 정교회의 수장(우두머리)의 지위를 이어받았다.

이반 4세(재위 1533~1584) 때는 러시아 황제로서 ‘차르’란 칭호를 사용하였다. 또 그는 전제 정치를 강화하고, 시베리아 정복에 착수하는 등 영토 확장에도 노력하였다.

그 밖의 동유럽 여러 나라들은 슬라브 족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나, 다뉴브 강 중류의 헝가리만은 아시아 계통의 마자르 족이 세운 나라였다. 마자르 족은 9세기에 이동해 왔는데, 11세기에는 크리스트 교로 개종하고 헝가리 왕국을 세웠다.

 

 

종교 개혁

 

ㅡ 교회의 타락 ㅡ

 

크리스트 교회는 본래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약한 자들을 돕거나 사람들을 바른길로 이끌기 위하여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고 교회의 세력이 커지자, 로마 교황과 성직자들은 크리스트 교 본래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돈벌이와 사치를 일삼았다. 교회에서 베푸는 의식은 갈수록 성대해졌지만, 신앙은 점점 겉치레뿐인 것으로 변해 갔다.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교황의 위시니 크게 떨어진 14세기에 이르러 교회의 부패와 타락에 대하여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신학 교수였던 위클리프는 교회가 재산을 갖는 것에 반대하여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기까지 했다. 그 후 보헤미아의 후스도 종교 개혁을 부르짖었으나, 이들의 개혁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독일에서는 황제의 권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면죄부를 팔고 있었다. 면죄부를 산 사람은 그 만큼 자기가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종교의 힘으로 재산을 모으려는 교회의 타락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종교 개혁의 원인이 되었다.

 

ㅡ 루터의 종교 개혁 ㅡ

 

르네상스의 물결을 타고 사람들의 자각심이 높아지자 새로운 종교 개혁이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16세기 초에 로마 교황 레오 10세는 산 피에트로 대성당을 재건하는 경비를 마련하려고 독일 사람들에게까지 면죄부를 팔았다.

이 때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였던 루터는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는 ‘95개 조 반박문

’을 발표하였다. 그의 주장은 ‘신앙의 바탕은 교황이나 교회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적은 성서에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교황 및 종교 회의의 결정에도 잘못이 있을 수 있으며, 일찍이 이단으로 처형된 후스의 의견에도 진리가 있다.’고 하면서 교황과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였다.

교황은 루터에게 파문이란 엄한 벌을 내렸으나, 루터는 이에 굴하지 않고 교황의 파문장을 대중 앞에서 불살라 버림으로써 종교 개혁의 굳은 의지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황제의 세력에 반대하던 일부 제후와 자치를 바라던 도시들이 루터를 지지하고 나섰다. 루터는 작센 제후의 도움을 받아 라틴 어로 씌어 있던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을 완성하였다. 라틴 어로 씌어진 성서의 독일어 번역은, 교황이 지배하던 종교를 국민의 종교로 변화시킨 것을 의미한다.

그 후 독일은 루터를 지지하는 신교도(프로테스탄트 교도)와 구교도(카톨릭 교도)와의 사이에 전쟁까지 벌어졌다. 이에 독일 황제도 할 수 없이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였다(1555년).

 

ㅡ 카톨릭 교회의 개혁 ㅡ

 

신교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구교(카톨릭 교) 쪽에서도 세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개혁 운동을 일으켰다. 이것을 반종교 개혁이라고 한다.

구교도들은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하여 교황의 권위를 재확인하면서 성직자와 교회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고, 어디까지나 교황을 정점을 하여 신교도에 대항해 나갈 것을 결의하였다.

한편 카톨릭의 부흥을 목적으로 한 예수회라는 선교 단체가 창설된 것이 이 무렵이었다. 1540년 에스파냐의 로욜라가 조직한 청빈 · 복종을 생활 신조로 삼고, 군대 조직에 따른 엄격한 규율로써 카톨릭의 옹호와 포교에 힘썼다.

예수회는 유러베서 교세를 회복하기 위하여 신대륙과 극동 지역에까지 많은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청나라에 온 마테오 리치, 일본에 온 사비에르 등이 예수회 교단의 선교사였다. 구교측의 이와 같은 활동에 따라 카톨릭 교회는 이탈리아 · 에스파냐 · 포르투갈 등에서 강한 호응을 얻고 프랑스 · 독일 · 영국에서도 많은 신자를 얻었다.

 

ㅡ 종교 전쟁 ㅡ

 

반종교 개혁 운동은 신교도와 구교도의 대립을 격화시켜,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전반에 걸쳐 몇 차례의 종교 전쟁이 일어났다.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는 열렬한 카톨릭 옹호자로서, 그의 지배 아래 있는 모든 영토 내에 카톨릭을 강요하였다. 이에 1581년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고 있던 네덜란드의 신교도들이 반기를 들어 독립을 선언하고 네덜란드 공화국을 세웠다.

프랑스에서는 왕위를 둘러싼 정치적 대립이 종교적인 대립과 결합되어 신교도인 위그노가 전쟁을 일으켰는데, 이를 위그노 전쟁(1562~1598)이라 한다. 이 전쟁은 오랫동안 계속된 끝에 앙리 4세가 낭트 칙령(1598년)으로 신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고, 신 · 구 양교의 정치상의 평등권을 인정함으로써 내란을 매듭지었다.

한편 독일에서도 신 · 구 교도 사이에 종교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이 30년 전쟁(1618~1648)인데, 유럽의 여러 나라가 참여하는 국제 전쟁으로 확대되어 30년간 계속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고,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개인의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었다. 이 조약을 끝으로 종교 전쟁은 마무리를 지었다.

 

 

절대 왕정 : 전제 정치의 융성

 

ㅡ 절대주의 국가 ㅡ

 

14~15세기에 중앙 집권적인 국가의 싹이튼 유럽 각국은 17~18세기에 와서 절정에 이르렀다.

왕의 권력은 점점 커져서 나라마다 강력한 전제 정치가 실시되었다. 각국의 왕들은, 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누구도 간섭할 수 없다는 왕권 신수설을 내세우며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그래서 이러한 나라들을 가리켜 절대주의 국가라 하고, 이 17~18세기를 절대주의 시대라 한다.

절대주의 시대의 왕들은 많은 관리와 군대를 거느려야 했으며, 그러기 위하여서는 돈이 많은 필요하였다. 그래서 각국의 왕들은 저마다 돈벌이에 열중하여 안으로는 상공업을 장려하고, 밖으로는 무역에 힘썼다. 이와 같은 경제 정책을 중상주의라 하며, 이 시대의 큰 특색을 이루었다.

이리하여 산업의 중심은 농업으로부터 공업으로 옮아 가고, 처음에 교역의 수단으로 쓰이던 화폐가 상공업의 밑천, 곧 "자본"으로 쓰였다. 상공업에 발달에 따라서 경제 활동이 자본에 따른 이익을 얻는 데에만 쏠려, 이른바 "자본주의"가 비롯되었다.

일찍이 절대주의 국가로 발전한 나라는 해외 진출에 앞장섰던 에스파냐와 백년 전쟁 등으로 귀족의 세력이 약해진 영국 · 프랑스 등이었다. 에스파냐는 이미 16세기 후반(펠리페 2세 때) 에 부강한 나라를 이루어 국력을 크게 떨쳤으나, 17세기부터는 차츰 기울어졌다.

 

ㅡ 에스파냐의 강성 ㅡ

 

절대적인 왕권과 중상주의 정책으로 유럽에서 맨 먼저 강대국의 자리에 오른 나라는 에스파냐였다.

포르투갈과 더불어 신항로의 발견에 앞장섰던 에스파냐는 16세기 후반의 펠리페 2세(재위 1556~1598) 때 절대주의가 확립되었고, 그 힘이 절정에 달하였다.

그는 무적함대라고 불린 강력한 해군력을 배경으로 프랑스와 싸워 이기고, 1571년에는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투르크의 함대를 쳐부수어 포르투갈을 병합하는 동시에 식민지도 함께 지배하였다. 이리하여 에스파냐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필리핀에 이르는 넓은 식민지를 차지하여 위세를 세계에 떨쳤다.

그러나 16세기 말에 네덜란드의 신교도가 반란을 일으켜 독립하고, 또 국내 산업의 발달이 부진하여 점차 국세가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영국 해군이 에스파냐 무적 함대를 깨뜨리고 에스파냐의 해상권을 빼앗았다. 이리하여 에스파냐는 몰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

 

ㅡ 영국의 발전 ㅡ

 

영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왕권의 신장이 빨랐다. 그러나 절대주의의 기초가 확립 된 것은 백년 전쟁과 장미 전쟁을 거친 뒤, 곧 헨리 7세가 튜더 왕조를 설립한 이후부터다. 이 때에 확립된 절대주의는 튜더 왕조의 마지막 왕인 엘리자베스 여왕(재위 1558~1603)때 절정에 이르렀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 국교회를 세워 종교를 통일하고, 관리 제도를 정비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한편 경제 정책에 있어서는 그레샴의 건의에 따라 화폐 제도를 개혁하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데 힘썼다.

영국이 해외로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한 것도 이 때다. 이 무렵 영국의 모직물 공업은 매우 성하였으나, 세계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에스파냐에 눌려 해외 수출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왕은 에스파냐의 세력을 꺾기 위하여 갖가지 수단과 방법을 썼다. 에스파냐의 지배 아래 있던 네덜란드가 독립 운동을 시작하자 적극 원조하였으며, 에스파냐의 무역선에 대한 약탈을 일삼는 해적들을 도와 주기까지 하였다.

이에 화가 난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는 영국의 방해를 물리치기 위해 무적 함대라는 강력한 함대를 보내어 영국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오히려 영국 해군에 의해 참패를 당하였다(1588년). 이 때부터 영국의 해상 활동은 활기를 띠게 되어 북아메리카와 인도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초 여왕의 뒤를 이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왕들이 전제 정치를 강화하자, 국민들 사이에 이를 반대하는 기운이 다시 일어났다.

 

ㅡ 프랑스의 발전 ㅡ

 

프랑스의 절대주의는 영국에 비해서 약 100년쯤 뒤늦게 나타났으나, 가장 대표적인 절대 왕정을 이룩하였다.

구교도의 세력이 강하였던 프랑스에서는 왕이 신교도 (위그노)를 탄압하였으므로 종교적인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부르봉 왕조를 연 앙리 4세의 낭트 칙령(1598년)에 의해 신교도도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태양왕이라고 불리는 루이 14세(재위 1643~1715년) 때 프랑스의 절대 왕정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왕권 신수설을 믿어 독재 정치를 하였으며, ‘짐이 곧 국가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또한 중상주의 정책을 써서 산업을 일으키고 무역에 힘썼으며, 강한 군사력을 길러 국위를 떨쳤다.

베르사유 궁전이 건설된 것도 이 때다. 루이 14세는 귀족과 문인·예술가 들을 이 궁전에 불러들여 문화를 장려했으므로, 파리는 이 때부터 유럽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편 루이 14세는 영토를 늘리기 위하여 유럽 최강을 자랑하는 육군과 풍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네 차례나 침략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유럽의 세력 균형을 바라는 영국 등 여러 나라의 대항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여러 차례의 전쟁과 호화로운 궁전 생활 등으로 나라의 재정은 점점 어려워져 갔다. 이것이 뒤에 프랑스 대혁명의 한 원인이 되었다.

 

ㅡ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ㅡ

 

독일의 여러 왕들은 통일보다는 신성 로마 황제의 자리와 교황의 환심을 사는 것이 더 큰 관심사였다. 더구나 신 · 구 교도 사이에 벌어진 30년 전쟁의 결과로 제후국들이 완전한 자치권을 얻게 됨으로써 통일의 가망은 더욱 희박해졌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 지금의 베를린 지방에 있던 프로이센 왕국이 독일의 통일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프로이센은 본시 여러 제후국 가운데 하나였으나, 차츰 힘을 길러 영토를 넓혀 나갔다.

18세기 초에 프리드리히 1세는 왕국의 영토를 확장하고 도읍을 베를린에 정하였다. 그 후 프로이센은 중앙 집권을 확립하고 강한 군대를 길러 프리드리히 대왕(재위 1740~1786) 때에는 유럽의 강대국 대열에 끼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즉위 초에 오스트리아와 싸워 슐레지엔 지방을 손에 넣는 한편, 프랑스 등 선진국의 학문과 기술을 받아들여 교육과 산업 발전에 힘을 기울여서 독일의 근대화를 이룩하였다.

또 ‘왕은 국가 제일의 종이다.’라고 한 그의 말로써도 알 수 있듯이, 그는 국민의 복지를 위해 많은 일을 하였다. 곧 산업의 진흥과 교육 및 학예를 장려함으로써 독일의 의식 수준을 급격히 향상시켜 위대한 문인·학자들을 많이 배출시켰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원래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는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단일 국가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의 황제는 신성 로마 황제를 겸하여 독일까지 지배하여 왔다. 그러나 30년 전쟁 뒤에는 그러한 관계가 끊어지고 독일은 오스트리아의 지배로부터 벗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오스트리아는 넓은 영토와 보헤미아(체코) · 헝가리 등 많은 이민족을 지배 아래 두고 위세를 부리고 있었다.

이 무렵의 오스트리아는 마리아 테레지아(재위 1740~1780)라는 여제(女帝)가 있었다. 여제도 국가 발전에 힘을 기울여 프로이센에 대한 복수를 꾀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ㅡ 러시아의 절대 왕정 ㅡ

 

오랫동안 몽고의 지배 아래 있던 러시아는 로마노프 왕조(1613~1917년)가 열리면서 발전해 나갔다. 특히 로마노프 왕조의 제 5대 황제인 표트르 대제(재위 1682~1725) 때에 이르러 러시아의 근대화가 급속히 이루어 졌다.

표트르 대제는 뒤떨어진 러시아를 근대화 하는 길은 서유럽을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있다고 보고, 자신이 직접 서유럽 일대를 시찰하면서 선진국의 제도와 기술을 많이 배워 왔다.

그는 러시아에 돌아오자마자 제도와 풍속을 뜯어 고쳤다. 공장을 세우고 해군을 조직하며, 교육에도 힘써 러시아는 전혀 새로운 사회로 변하여 갔다.

당시의 러시아는 바다로의 출구가 없었다. 이에 표트르 대제는 발트 해 연안으로의 진출을 꾀하여 이 지역의 강대국이었던 스웨덴을 무찌르고 발트 해와 그 연안 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남쪽의 투르크와 싸워 영토를 넓히고, 동쪽 시베리아로 진출하여 청나라와 국경을 이웃하였다.

표트르 대제의 훌륭한 정치에 의하여 유럽의 강대국 틈에 끼여든 러시아는, 그 후 여제인 예카테리나 2세(재위 1762~1796년) 때에 더욱 발전하였다.

예카테리나 2세는 표트르 대제의 사업을 계승하여 서유럽의 문화 수입과 내정 개혁에 힘쓰는 한편, 투르크와 싸워서 크림 반도와 흑해 연안을 빼앗아 부동항(바다가 얼지 않는 항구)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침략의 손길은 서쪽 폴란드에도 미쳐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와 손을 잡고 폴란드 영토를 나누어 가지려고 세 차례나 폴란드의 분할을 단행하였다(1772,1793,1795년). 이리하여 폴란드는 완전히 멸망하고, 영토의 반 이상을 러시아가 차지하였다.

 

 

시민 혁명과 산업 혁명

 

ㅡ 영국의 시민 혁명 ㅡ

 

영국은 서양에서 가장 먼저 근대적인 민주 정치가 싹튼 나라다. 13세기에 벌써 대헌장이 제정되어 국민의 권리가 부분적으로 보장되고, 의회(국회)도 성립되었다.

그러나 16세기에 이르러서 왕의 권력이 점점 커지자, 왕은 의회나 국민을 무시하고 멋대로 정치를 하였다. 이와 같은 전제 정치는 국민의 권리를 짓밟고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었으므로 국민들이 혁명을 일으켜 왕의 전제 정치를 무너뜨렸다. 이 때 혁명을 일으킨 중심 세력은 상공업에 종사하는 시민 계급이었다. 따라서 이 혁명을 시민 혁명이라 부른다.

시민 혁명은 영국에서 먼저 일어났다. 영국은 상공업이 다른 나라보다 일찍 발달하고, 이에 따라 시민 계급의 세력도 커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왕의 전제 정치가 심하더라도 국민의 힘이 약하면 혁명을 일으킬 수 없으므로, 시민 혁명은 상공업이 발달하고 시민 계급의 힘이 큰 나라일수록 먼저 일어났다.

 

ㅡ 청교도 혁명 ㅡ

 

영국을 크게 발전시킨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자 왕의 친척이며 스코틀랜드의 왕인 제임스 1세가 뒤를 이어 스튜어트 왕조를 열었다.

제임스 1세는 일찍이 민주주의에 눈뜬 영국 국민을 이해하지 못하고 왕권 신수설을 주장하여, 자기 나라에서처럼 정치를 마음대로 하였다.

그 뒤를 이은 찰스 1세는 제임스 1세보다 더 심하게 전제 정치를 하였다. 그는 의회를 무시하고 함부로 세금을 거두어들였을 뿐만 아니라, 국교만을 강요하며 당시 상공 시민들 사이에 퍼져 있던 신교파인 청교도들을 탄압하였다.

이에 의회는 찰스 1세에게 국민의 기본 권리와 의회의 특권을 인정할 것을 주장하는 권리 청원을 제출하였다(1628년). 찰스 1세는 처음에 이를 받아들였으나, 이듬해에 의회를 해산하고 전제 정치를 계속하였다.

그 뒤 그는 국교회 정책에 반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비용을 마련하려고 다시 의회를 소집하였는데, 이 때 의회는 국왕의 전제 정치를 맹렬히 비난하였다.

그리하여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에 내란이 일어났다(1642년).

이 내란은 8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청교도의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가 왕의 군대를 무찌르고 승리를 거두었다. 의회는 찰스 1세를 사형에 처한 후,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포하였다(1649년). 이것을 청교도 혁명이라고 한다.

 

ㅡ 명예 혁명 ㅡ

 

크롬웰은 새 공화국의 우두머리가 되어 여러 가지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는 반대파를 누르려고 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이것은 개혁을 실행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너무 엄격한 정치를 하였으므로 국민들의 반감을 샀다. 그리하여 크롬웰이 죽자 혁명을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나 공화 정부가 무너졌다. 그리고 1660년 프랑스에 도망가 있던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돌아와 왕위에 오름으로써 왕정이 복고되었다.

그런데 찰스 2세와 그의 뒤를 이은 제임스 2세는 카톨릭 신자로서 카톨릭 교도의 편만 들고 국민의 의사는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왕을 갈아치우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에 의회는 제임스 2세를 추방하고, 왕의 맏딸인 메리와 그의 남편인 윌리엄을 맞아들여 영국의 새 왕으로 즉위시켰다. 국민의 지지를 잃은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달아났으므로 혁명은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성공하였다(1688년). 따라서 이 혁명을 명예롭게 이루어졌다고 하여 명예 혁명이라 한다.

새로 왕위에 오른 신교도인 윌리엄 3세(재위 1689~1702년)는 의회가 내놓은 권리 선언이란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의회와 국민의 권리를 확인하고 의회를 존중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권리 선언은 곧바로 권리 장전이란 이름으로 공포되었다.

이리하여 국왕의 절대주의와 국민의 입헌주의와의 투쟁은 국민의 승리로 끝을 맺고, 국가의 주권은 의회로 돌아가 영국의 입헌 정치가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ㅡ 의회 정치의 확립 ㅡ

 

명예 혁명 이후 영국의 왕들은 의회를 존중하고 의회에서 정한 법에 따라 정치를 해 나가게 되어, 의회 정치의 기초가 여기에서 확립되었다.

영국에 정당이 생긴 것도 이 무렵이었다.

명예 혁명이 있기 조금 전에 토리 당휘그 당이라는 두 정당이 생겼는데, 의회 정치의 기틀이 잡히면서 정당에 의한 정치가 더욱 발달하였다 이로써 정치의 실권은 의회가 쥐게 되고 왕은 이름뿐인 존재가 되었다.

그 후 영국의 앤 여왕은 스코틀랜드를 합쳐 대영 제국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앤 여왕을 끝으로 스튜어트 왕조가 끊어지고, 독일의 하노버 왕가의 조지 1세가 그 뒤를 이었다. 이리하여 하노버 왕조가 성립되었고, 이 때부터 내각 책임제가 생겨났다.

 

 

프랑스 대혁명

 

ㅡ 낡은 제도의 모순 ㅡ

 

프라스는 영국 다음으로 상공업이 발달한 나라였으나, 정치 제도는 너무 뒤떨어져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일찍이 성직자 · 귀족 · 평민의 대표로 이루어진 삼부회라는 의회가 있었으나 17세기 초에 열린 것을 끝으로 그 후 약 170년 동안 의회를 한 번도 열지 않고 왕이 마음대로 정치를 하였다. 프랑스는 국왕 아래 제 1신분의 성직자와 제2신분의 귀족이 특권 신분으로서 지배 계급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국민의 약 1%에 불과하였으나,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토지는 전국토의 약 40%나 되었다. 또한 그들은 국가의 중요한 자리는 모두 독점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평민(시민·농민)은 무거운 세금을 부담하고 있었지만 아무 권리도 없이 전제 정치 밑에서 허덕여야 했다. 평민 중 특히 시민 계급은 이미 부(富)를 축적하여 지배층에 대항할 힘을 갖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분적인 구속과 절대주의의 통제로 자유로운 발전을 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은 이와같은 구제도에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에 퍼진 계몽 사상은 그들을 자극하여 자유와 평등 사상에 눈뜨게 하였다. 더욱이 미국이 독립하여 자유를 얻은 것을 본 프랑스 인들은 더욱더 구제도의 모순을 절실히 느끼고 이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ㅡ 바스티유 감옥의 습격 ㅡ

 

부르봉 왕조의 절대 군주 루이 14세는 호화로운 생활과 무모한 전쟁으로 제정이 궁핍하였다. 또한 뒤를 이은 루이 16세는 국가의 재정을 바로잡아 보려고 경제학자 튀르고 등을 재무 장관으로 등용하여 재정 개혁을 시도했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최후의 방법으로 오랫동안 열지 않았던 삼부회를 소집하여 해결책을 찾아보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1789년 5월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삼부회가 열렀다. 여기에 모인 대표자수는 서직자가 308명, 귀족이 285명, 평민이 621명이었다.

그런데 회의가 열리자마자 표결 방법을 놓고 의견이 맞섰다. 특권층은 제1 · 제2 · 제3 신분을 각각 한 표로 하는 신분별 의결을 주장한 데 대하여 평민층은 사람수에 따른 다수결을 주장하였다. 서로의 의견이 엇갈리자 평민들은 따로 모임을 가지고 자기네들이야말로 진정한 국민의 대표라는 뜻에서 국민 의회를 만들었다.

한편 루이 16세가 평민층의 모임을 무력으로 해산하려 하자, 이 소식을 들은 파리 시민들이 손에 손에 무기를 들고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7월 14일). 이 감옥은 정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가두어 두었던 곳으로, 전제 정치의 상징처럼 되어 있었다. 파리 시민들은 감옥을 파괴하고 정치범들을 풀어 주었는데, 이것이 혁명의 첫 불길이 되었다.

이 무렵 혁명을 지지하는 파리 시민들은 모자에 적(赤) · 백(白) · 청(靑)색의 띠를 두르고 다녔는데, 이것이 프랑스 국기인 3색기가 되었다.

 

ㅡ 인권 선언 ㅡ

 

파리에서 일기 시작한 혁명의 불길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번져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농민들은 지금까지 그들을 못살게 굴었던 영주나 관리의 집을 습격하고 재물을 빼앗았다. 한편 국민의회에서는 성직자와 귀족이 중세 이래 지녀 온 여러 가지 특권의 폐지를 결정하였다. 이로써 봉건 제도의 뿌리가 말끔히 뽑히었다.

그리고 그 해 8월 26일에는 유명한 인권 선언을 발표하여 혁명의 근본 정신을 밝혔다.

이것은 미국의 독립 전쟁에 참가하였던 라파에트가 기초한 것으로, 전문과 17조로 되어 있다. 곧 자유 · 평등 · 주권 재민, 사상과 언론의 자유 등 근대 민주주의와 시민 사회의 원칙을 포함하고 있다. 이 인권 선언은 이후 세계 여러 나라 헌법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ㅡ 혁명의 과격화 ㅡ

 

그 후 국민 의회는 여러 가지 개혁을 실시하는 한편, 헌법 재정에도 착수하였다. 그런데 이 때에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비의 친정 나라인 오스트리아로 도망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일어났다(1791년).

이 사건으로 국민들은 왕을 매우 미워하게 되고 왕정의 폐지를 의논하였다. 이리하여 혁명의 기세가 날로 높아지자 그 영향이 자기 나라에도 미칠 것을 두려워한 오스트리아 · 프로이센의 군대가 프랑스에 쳐들어왔다.

의회는 즉시 비상 사태를 선포하고 의용군을 모집하였다. 혁명을 지지하는 청년들이 전국에서 몰려왔는데, 이들은 지금의 프랑스 국가가 된 라 마르세예즈를 소리 높이 부르며 파리로 왔다. 애국심에 불타는 의용군은 정규 군대보다 훨씬 강하여, 마침내 외국 군대를 물리치는 데 성공하였다.

외국군의 침입은 혁명을 더욱 과격한 길로 치닫게 하였다. 과격파의 세력이 커진 의회는 드디어 공화정을 선포하고(제1공화국 :1792년), 얼마 후 루이 16세를 재판하여 사형에 처하였다.

왕의 처형은 국내외에 커다란 충격을 주어 안에서는 왕당파의 반란이 일어나고 밖에서는 영국 · 오스트리아 · 프로이센 등 여러 나라가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위협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과격파(자코뱅 당)는 폭동을 일으켜 온건파(지롱드 당)를 의회에서 내쫓고 혁명 정부를 세웠다(1793년).

자코뱅 당의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혁명 정부는 토지 개혁을 실시하여 무상으로 토지를 나누어 주고 미터법을 실시하는 등 과감히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혁명 재판소를 두어 반대파를 모조리 잡아서 단두대에 보내어 처형하였다.

자유와 평등을 내세운 혁명이 이와 같이 공포 정치로 변하게 되자, 사람들은 더 이상의 혁명을 원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공포 정치를 반대하는 세력이 커져서 로베스피에르와 그 일파는 결국 국민의 적이라는 낙인이 찍혀 사형을 당하였다(1793년).

 

 

산업 혁명

 

ㅡ 산업 혁명의 의의와 배경 ㅡ

 

프랑스 혁명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영국에서는 산업 혁명이라는 산업상의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산업 혁명이란 한마디로 말하여 ‘도구’에서 ‘기계’로의 발전이었다. 기계가 발명됨으로써 지금까지의 수공업은 기계 공업으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생산량은 급격히 늘어나 경제와 사회 생활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다.

산업 혁명은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근대 사회를 이룩한 기둥 구실을 하였다. 곧 근세 초기 이래의 자본주의가 여기서 확립되었으며, 사회적으로 시민 계급이 사회를 움직이는 주역이 된 것도 이 때부터다.

산업 혁명은 영국에서 먼저 일어나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영국은 일찍부터 세계 무역에 종사하여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으며, 식민지를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원료를 얻기가 쉬웠을 뿐만 아니라 상품을 소비할 넓은 시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영국은 지하 자원이 풍부하고, 시민 혁명 후 정치가 안정되어 있었다는 것 등이 영국에서 먼저 산업 혁명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었다.

 

ㅡ 산업 혁명의 진행 ㅡ

 

산업 혁명은 먼저 방직 공업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영국은 세계의 상업권을 독차지하고 있어 많은 식민지에 면직물을 팔았는데, 물건이 달리자 대량 생산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필요에서 기계가 발명되었다.

1764년 하그리브스가 무명실을 잣는 방적기를 발명하였다. 실을 잣는 데 한 올씩 손으로 뽑던 것을, 이 기계로는 한번에 여덟 올씩이나 뽑아 낼 수 있었다.

그 후 방적기는 아크라이트 · 크롬프턴 같은 사람에 의해 한층 개량되었다. 뒤를 이어 카트라이트는 동력을 이용하여 직물을 짜는 역직기를 발명하였다(1785년). 이와 가튼 기계의 발명은 영국 방직 공업의 생산량을 전보다 몇 배로 늘게 하였다.

방적기는 처음에 동력으로서 물을 이용하였다. 따라서 공장도 강 옆에 세워졌다. 그러나 강물을 이용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고, 또 그런 곳은 교통도 불편하여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많았다. 그래서 어디서나 자유로이 쓸 수 있는 동력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이와 같은 필요에 따라 나타난 것이 와트가 만든 증기 기관이다(1765년). 이에 방적기와 직조기에 증기 기관이 동력으로 이용됨으로써 목면 공업의 생산은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

또한 기계 공업의 발달로 물건이 대량으로 생산되자 물건들을 빠르게 멀리 운반할 수 있는 교통 수단이 필요하였다.

19세기 초에 영국의 스티븐슨 증기 기관을 단 기관차를 발명하여, 1830년에는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를 달리게 되었다. 그 후 철도가 곳곳에 가설되어 교통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또한 이보다 앞서 미국의 풀턴이 만든 기선이 허드슨 강의 항해에 성공하여 수상 교통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ㅡ 산업 혁명의 영향 ㅡ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 혁명은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경제가 발달하고 생활이 편리해졌으나, 한편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도 생겨났다.

기계 공업의 발달로 수공업자가 몰락함에 따라 공장을 세운 자본가들은 싼 임금으로 노동자를 부릴 수 있었다. 그리하여 자본가는 더욱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기계의 노예가 되고, 노동 조건은 갈수록 나빠졌다. 또하 지나친 생산으로 공장이 쉬게 되자 실업자가 생기고, 따라서 품삯은 더욱 떨어져 사회 문제가 발생하였다. 뿐만 아니라 농촌 인구가 도시로 모여들어 도시의 인구 문제 · 위생 문제 등이 일어나 사회는 더욱 복잡해져 갔다.

한편 노동자들은 그들의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서로 단결하여 자본가와 대립하였다. 그리하여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프롤레타리아)의 대립을 배경으로 노동 운동이나 사회주의 사상이 움텄다.

또한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 혁명은 곧 유럽 대륙을 거쳐 세계 여러 나라로 파급되었다.

19세기 중엽에는 프랑스에서도 산업 혁명이 일어났다. 영국으로부터 기계와 기술을 수입한 프랑스는 리옹의 견직물 공업을 시초로 하여 산업 혁명이 시작되었다.

독일과 미국은 산업 혁명이 조금 늦게 시작되었으나, 19세기 말에는 제철 · 제강 · 화학 공업 등의 중공업이 발달하여 오히려 영국을 앞섰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외국의 기술과 자본을 도입하여, 1890년대에는 산업 혁명이 급속히 추진되었다. 또 이를 전후하여 이탈리아와 일본에서도 공업화가 일어났다.

 

 

민족주의의 발전

 

ㅡ 이탈리아의 통일 ㅡ

 

오스트리아 · 프랑스 등 외세의 침투 속에 분열을 계속하고 있던 이탈리아에서도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자유와 통일을 위한 운동이 여러 차례 시도되었다.

특히 프랑스 7월 혁명에 자극을 받은 마치니는 ‘청년 이탈리아 당’을 조직하고 로마 공화국을 수립하는 등 통일 운동을 벌였으나, 프랑스의 간섭으로 실패하였다. 그 후 이탈리아의 통일 운동은 북부의 사르데냐 왕국을 중심으로 추진되어 결실을 보았다.

사르데냐 왕국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카보우르를 수상으로 임명하여 내정을 개혁하고 군비를 강화한 후, 프랑스의 도움을 얻어 오스트리아에 대항하여 통일 전쟁을 일으켰다(1859년).

그러나 전쟁중에 이탈리아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 한 나폴레옹 3세는 오스트리아와 단독으로 휴전을 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오히려 이탈리아 국민의 민족 의식을 자극하여, 이탈리아의 작은 나라들이 사르데냐 왕국에 합치기를 자청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통일 운동은 더욱 발전하였다.

한편 이 무렵에 가리발디라는 애국 지사가 나와 의용군을 이끌고 시칠리가 섬과 나폴리 지방을 정복하여 사르데냐 왕국에 바쳤다.

이리하여 교황령과 베네치아를 제외한 이탈리아 반도의 거의 전부가 사르데냐 왕국 밑에 통일되어 이탈리아 왕국의 성립을 보았다(1861년).

그 후에 오스트리아로부터 베네치아를 되찾고, 1870년에는 프로이센 · 프랑스 전쟁(보불 전쟁)을 틈타서 로마를 점령하고 수도로 삼았다. 이로써 이탈리아의 통일은 마침내 완성되었다.

 

ㅡ 독일 제국의 성립 ㅡ

 

프로이센 · 프랑스 전쟁에서의 승리는 프로이센의 위치를 더욱 높여 주어 독일의 통일 기운은 급속도로 무르익었다. 파리가 함락되기 전인 1871년 1월 독일의 여러 왕들은 베르 사유 궁전에 모여 빌헬름 1세를 독일 제국의 황제로 추대하였다. 이어 독일 제국의 헌법도 만들어져 독일은 마침내 통일을 했다.

통일의 대업을 성취시킨 비스마르크는 새로 탄생한 독일 제국의 초대 수상이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5월 칙령을 발표하여 교회에 대한 감독 · 통제를 강화했다. 또한 사회주의자 진압법을 제정하여 사회주의자의 언론 · 집회 · 결사의 자유를 억압하였다. 한편 경제적으로는 보호 무역 정책을 써서 산업을 발달시키고, 해외 식민지를 얻기 위해서 노력하였다.